나는 누굴까

2018.06.04 04:10


그러게. 나란 누굴까?


내 이야기는 장 폴 사르트르의 말로 시작해야지.


1980년대, 어린 꼬마였던 나는 이상하게 어려운 책을 골라 읽길 좋아했었다. 세 살부터 피아노, 바둑, 책을 열심히 가르친 어머니 덕분이었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며 읽던 건 아니었지만. 어른들의 아리송한 고뇌와 발자취를 더듬어 나가는 일이 그렇게 재미있었다.


어머니처럼 교양을 쌓기를 즐기는 이모의 서가에도 루소의 에밀 등의 책이 많이 꽂혀 있었다. 시골로 놀러갈 적마다 아궁이로 불을 때는 한옥에서 제일 작은 방을 쓰는 이모의 방에서 철학자들의 말을 접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처음으로 읽어본 것도 이모의 방에서였다. 지금은 대머리 아저씨의 생각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지만 「개미」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썼지. 아무튼 철학자의 말을 모은 책에서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이 우연히 눈에 스쳤다.



《…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기쁨이 넘쳐흘러서 펜을 놓았다. … 나는 말이 사물의 진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내가 쓴 꼬불꼬불한 작은 글씨가 도깨비불 같은 빛(영감을 말하는 듯하다)을 잃고 차츰차츰 단단하게 굳어 가는 것이 나를 흥분시켰다.


나는 글쓰기로 태어났다… 최초의 소설을 쓰자마자 나는 알았다. 한 어린애가 거울의 궁전 안으로 들어섰음을. 나는 글을 씀으로써 어른들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나는 오직 글쓰기를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



나도 내가 뭘 잘하는지를 일찍이 알았다. 거짓말을 잘 짓는 재주가 있었다. 그걸로 남을 상처입히고 나도 지독하게 상처입는다는 걸 몇 번 뼈저린 경험으로 알고는. 내가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어져서 세상과 나 사이에 거리를 둔 겁쟁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재능을 나쁜 쪽보다 좋은 쪽으로 살리고 싶어 이야기를 지어댔다.


중학교 때 TRPG 라는 역할 놀이 게임을 알자마자 바로 주위 사람들을 끌어들여 마스터링을 했다. 지금이나 그 때나 RPG 배우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인데. 그 때는 정말이지 정보가 부족했다. 조악하게 번역된 룰북을 혼자 보고 깨치기 힘들어서 룰을 배우질 않고 서사 전개에만 의존해서 놀았다. 그 때 내멋대로 게임을 짜고 놀며 든 여러가지 잘못된 습관이 인생에서 오래도록 발목을 잡았지만. 내가 나이게 하는데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야기를 신명나게 하고 NPC를 부리면 난 마스터하려고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 폴 사르트르가 처음으로 이야기를 쓰고 느낀 기분이 이것이었을까.


특히 나는 순수한 여자가 잔혹한 이야기에 휘말려드는 이야기를 잘했다. 엔야(Enya) 노래가 잘 어울리는 분위기의 이야기. 그래서인지 문학도 안나 카레니나를 제일 좋아했다. 위험한 성인물 RPG도 시도하곤 했다.


그러면서 나는 게임을 만들고 싶어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세상은 나에게 너무도 무서운 공간이어서. 대신 이야기 속에서 살면 무섭지 않을 거 같았다. 하지만 199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게임 분야에서 이야기 쓰는 사람을 받아주는 데는 딱 잘라 말해 없었다. 그림 음악 분야에 종사하거나 프로그래밍, 기획을 할 줄 알아야 했다. 나는 크게 실망했다.


몇 번 게임계에 입문할 기회는 있었다. 컴퓨터 RPG 게임 모드를 만들다가 외국 게임 회사에 이메일을 받아보기도 했는데 겁이 나서 답하지 않고 숨어버렸다. 빠듯하게 사는 어린 학생에게 비행기 탈 돈 따위 없기도 해서였다. 지인에게 게임 업계에서 일해보라는 친절한 제안을 받은 적이 몇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모자라는 실력에 겁이 앞서서 된 게 없었다.


나는 게임 개발자는 못 되는구나 싶었다. 십 년 전 2008년 즈음 UC 노벨이라는 데서 동인 게임으로나마 혼자서 실컷 하나 만들어보고는 그래. 나는 역시 이야기로 먹고 살자고 다짐하고 엉뚱하게도 영화 각본에 도전했다. 영화가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시작했지만.


영화를 독학하면서 얼른 돈을 벌어야 한다는 마음에 다급하게 스스로를 다그치듯이 쓰는데 제대로 될 리 없었다. 하나도 팔질 못하는 지독한 실패였다. 난 솔직히, 한국 사회에 도통 적응하지 못했고 특히 거친 남자들을 아주 싫어했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는 게 힘들어서 병동에 갇힐 정도였으니까. 그런 내가 어떻게 배우에게 멋진 대사를 시킬 수 있을까. 먹힐 만한 라인을 써낼 리가 만무했다. 아. 그렇다고 내 진짜 문제를 슬쩍 비껴나가진 말자. 제대로 글쓰기를 배우지 않았고, 배우려고도 않은 게 진짜 문제였다.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아는 게 늘고 어휘가 느는데 그게 꼭 좋은 일이 아니다. 머릿속에 늘어난 재료를 어떻게 내 것으로 소화해서 적재적소에 녹여낼지를 모르면. 안전한 표현 몇 개만 잘 활용해도 그럭저럭 괜찮던 어릴 때의 단순함에서 벗어난 글이 점점 끝없는 갈래길에 빠진다. 문장 하나를 두고도 고민한다. 어느쪽을 써야 좋나. 뭘 써야 하지? 심란해진 마음은 글에 그대로 투명하게 비친다. 삐뚤빼뚤 비문투성이가 된 자기 글을 보면 자신감이 떨어져 안전하게 쓰려고 든다. 그렇게, 사람은 어른이 되면 가장 재미없는 이야기만을 반복하려 든다.


또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소설이든 영상물이든 외국에서 만든 이야기인데. 내가 좋아하는 창작물에 흠뻑 빠지면 거기에서 좋은 영향을 받아서 내 글쓰기가 늘어야 하는데. 온통 영문 직역체와 일본어 중역체에 물든 걸 보고 나면 단순한 글 한 줄 적으려고 해도 대체 문장 순서를 어떻게 놓아야 좋을지 한참을 고민하는 국제적 미아가 되는 병리 현상을 얻었다. 뭐 1990년대 서브컬처 키드가 다같이 겪은 문제다.


거듭된 실패는 사람을 바닥까지 떨어뜨린다. 뭔가를 쓸 수 없었다. 맨 처음 쓴 각본 하나를 빼면 제대로 된 게 없다는 생각만 무럭무럭 들었다. 캄캄한 굴 속에 들어앉아서 폭우가 쏟아지는 바깥을 꼼짝없이 바라만 보는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하고 전부 손놓은 채로, 그저 죽음만 기다리듯 차갑게 누운 날도 있었다. 일어나서 머리를 흔들고 시놉시스 한 줄 쓰면 나도 이해 못 할 쓰레기같은 이야기가 손끝에서 흘러나와 연필을 꺾고 싶고 넌더리가 났다.


삼 년 전. 건강이 안 좋아진 나는 병원에 입원했다. 육 인실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지금까지처럼 살 수는 없어.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을 다시 봤다.



《… 내가 재능 넘치는 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적수공권의 무일푼으로 노력과 믿음만으로 나 자신을 구하려는 것뿐이었다… 나는 장비도 연장도 없이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



글귀를 보고 울었다. 글은 그만 쓰자. 생각하는 법부터 배우기로 했다. 말이라고 막 내키는대로 하는 게 아냐. 나부터가 내 생각을 이해하고 논리를 단단하게 쌓을 줄 알아야지... 내가 뭔가를 생각하는 단계에서부터 문장의 뼈대가 갖추어지는 거야. 문장이 곧 생각인 걸. 생각부터 가다듬자.


처음에는 이 땅에서 글앓이를 하는 다른 모든 이들처럼 남이 쓴 글자들을 더듬으면서 남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국내 소설을 모조리 훑어보며 문장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이 사람은 어떻게 글을 썼을까. 보고 필사하느라 하루가 쏘아낸 화살같이 지나갔다. 바깥 활동이 뚝 그치고 아는 친구도 사라졌다. 인연이 끊어져 나가는 게 무서웠지만 사람들에게 나 잘 있다고. 당신은 잘 지내냐고. 당신을 잊지 않았다고 안부 한 줄 남기기가 힘들었다. 누군가와 관계하려는 욕망마저 사라져서였다.


한 자도 못 쓰는 나날에서 한 자도 안 쓰는 나날로 바꾸고 시간이 흘렀다. 남의 작품을 계속해서 보면 약간의 표현력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독해도 지나치면 그럴싸한 짜집기와 표절만 잘 하게 될 뿐이다. 그렇게 글쓰기를 배우면 작가 팬질을 하는 동인물이지 뭐지 싶었다. 사모하는 마음을 버렸다. 이외수도 공지영도 최옥정도 김영하의 책도 덮었다. 원론적인 이야기를 봤다. 소설로 소설 배운다는 뜬구름 잡는 짓을 버리고, 개똥 철학을 이야기하는 작법서도 버리고, 그저 문장을 어떻게 쓰는지 가르쳐주는 평범한 책을 봤다. 사람마다 겪는 어려움이 다르겠지만 나는 그 레벨에서부터 막혔으니까. 찾아보면 출판 전문인이 쓴 도움이 되는 책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불친절하게 쓰여서 사람들이 쉽게 다가갈 수 없었을 뿐이지. 나만 글쓰기 어려움을 겪던 게 아니었는지. 유유출판사에서 교정 전문가가 쓴 책이 나오자 곧 인기를 탔다. 


나는 유행을 따라서 교정의 숙수가 쓴 아름다운 글맛을 헤아리는 책을 보지 않았다. 나는 보다 근원적인 책을 읽느라 바빴다. 철학책을 봤다. 많이 읽지는 않았다. 내가 이해할 만한 서너 개를 찾을 줄을 알면 충분하다. 버트런드 러셀과 비트겐슈타인과 니체가 내 마음에 새롭게 자리잡았다. 화이트헤드는 알고자 하는 욕심은 앞섰지만 내 수학 실력이 떨어져서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놔두자. 내가 철학을 할 것도 아닌데. 깨끗이 포기하고 물러났다. 근대 철학만 본 건 아니었다. 마이크 센델의 강연도 몇 번 봤다. 남들 하는 잡소리에 물들어서 어느새 나도 모르게 분신처럼 들고 다닌 편견과 인터넷 검색으로 차올랐던 엉터리 정보가 조금씩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과학 책도 봤다. 전문 서적을 펴고 어려운 단어를 외우려고 해 본 적이 있었다. 허사였다. 억지로 외운 건 아무데도 써먹을 수 없다. 그런 것들을 어떻게든 붙들고 써도 얄팍함이 금방 드러나는 쓰레기밖엔 나오지 않는다. 어려운 기술 용어를 자랑하는 것보다, 내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일반 교양서를 치밀하게 읽고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자세를 기르려고 애썼다.


그러는 동안 남의 작품은 안 봤다. 볼만한 게 없어서가 아니고 나를 위해서였다. 무엇을 보건 스스로 판단하되 남이 만든 걸 경멸하거나 함부로 낮잡아 보는 시선을 없앨 때까지는 조심하고 싶었다.


물론. 경멸도 하고 싶으면 할 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은 자기 생각이 얄팍해서 나오는 실언이므로 최대한 아껴야 좋을 뿐이지. 예를 들어 보자.


순전히 내가 느낀 바에 불과하지만, 문인들이 쓴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오늘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가치관에 붙들려서 과거의 망령과 섀도우복싱하는 글 아니면, 그냥 일기장에 썼으면 좋았을 것들을 이야기라고 쓴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자기 이야기를 쓰라는 말은 참 따뜻하고 진실한 좋은 말이지만. 거기까지가 글쓰기의 전부면 자기 힐링하는 이상은 되지 않는다. 그런데 국내 작법서부터 이야기까지 자기들의 상처를 핥는 데에 너무나도 집착해서 이야기라는 본연의 재미를 잃곤 한다. 자가발전하고 자기에게 전력 보내 행복회로 아니면 분노회로를 풀가동해 스스로 소비까지 전부 다하는 자기완성형 글들 말고는 다른 것을 보기가 힘들다. 피곤했다. '내 이야기' '나만 할 줄 아는 이야기'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사회 고발 르뽀식 소설에 진저리가 난다. 그런 소설 반드시 필요하긴 한데.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사회 고발을 신랄하게 잘한 사회부 기자처럼 뜬 게 아니다. 한국을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이해할 수 있게 개개인의 불행을 그려서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고뇌야말로 가장 큰 고뇌다. 뭘 이야기하더라도 사회 이념적인 비판이 깔리면 얼마나 꼰대스럽고 짜증나는가. 아저씨들이 뭘 말하다가도 무조건 OO도가 문제고, 조중동이 다 문제고 페미가 문제고 종북이 다 문제라는 식의 단순 폭력적인 결론으로 나가는 몸서리치게 무식한 소리만큼이나 말이다. 그리 따지니 어떤 문인들 글은 오유 일베 글하고 대체 뭐가 다른지. 전자는 한 백명 쯤 사보라고 공들여서 한 권 분량으로 쓰고 후자는 남들이 많이 보라고 세 줄 요약해서 자극적으로 툭툭 뱉는 정도일까.


그래. 쓰고 나니 경멸이 얼마나 소모적인 표현인지를 체감할 수 있다. 내가 방금 쓴 이야기에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틀림이 있다. 사회 비판적인 소설도 잘 쓴 소설은 얼마든지 읽을 만 하고, 그것만 쓸 줄 아는 사람은 그냥 그것만 계속 쓰면 되고 내가 나서서 뭐라할 자격이 없다. 그러니 비판하며 보되 경멸하지 말자. 거듭 다짐하니 남이 쓴 이야기도 다시금 감명 깊게 볼 수 있었다. 요즘은 보통 사람들이 억지로 보통스러운 척하지 않으려는 이야기가 얼마나 멋진지 모르겠다. 만화가 김보통의 이야기가 좋았고 단지의 단지도 좋았다. 길고 알쏭달쏭하게 써놓은 국내외 장편 소설보다 동화 작가가 쓴 한 줄에서 진실한 울림을 볼 때가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남들이 보면 탑에 갇혀 마법에 걸려 눈 뜬 장님과 다름없이 지내는 아리테 공주처럼 집에서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면서 생각했다. 그래, 하루에 생각 하나를 천천히 빨아들여서 문장 하나를 겨우 뱉어내어도 괜찮아. 아무렴. 아무것도 제대로 배우려 들지 않고 큰소리만 치다가 죽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뭔가 엄청 바쁘게 살면서도 실제로는 머리가 죽어있는 채로 사는 것보다는 나은걸. 문장 하나를 배우는 데 시간을 들이더라도 쓸데없는 건 배우지 말고. 꼭 필요한 걸 가려 배워 내 것으로 만드는 거야. 그러면 그게 바로 내 진실한 생각이고 진실한 문장이 되지. 그 한 줄에 거듭거듭 인생을 걸어 보겠어.


다른 이들보다 못나게 사는 나지만. 내 입장에선 남하고 별다를 것 없는 하루를 산다. 오늘이 어제보다 나을지를 점검하고. 몽상하고 고민할 시간에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오늘도 헤엄 못 치는 수달이 물가에서 끙끙거릴 것이다. 힘내요.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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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섬녀 2018.06.04 08:19 신고

    이 작은 굴에 약간의 꽃잎과 생선을 두고 갑니다. 동굴을 들여다보니 좋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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